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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12-26 조회수 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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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중국대륙에 부는 '홍색관광 열풍' 그 현장을 가다!
권기식 중국 칭화대 방문학자
기사입력 2017-12-26

<중국 현지르포>중국 공산당 혁명 유적지 관광 붐, 역사교육과 지역 경제 활성화 ‘일석이조’ 효과

권기식 중국 칭화대 방문학자 | 기사입력 2017/12/26 [09:51]

▲ 권기식  중국 칭화대 방문학자.   ©브레이크뉴스

최근 중국은 공산당 혁명 유적지를 관광하는 ‘홍색관광’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지난해 홍색관광에 나선 중국인이 무려 11억4천700만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정도면 대다수 중국인들이 한번 이상 홍색관광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제 19차 당대회 이후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상무위원 6인과 함께 방문한 상하이 공산당 제 1차 전국대표대회 유적지와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시의 난후(南湖) 홍선 유적지 등은 인기 홍색 관광지로 알려져 연일 중국 전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북적대고 있다.


필자는 지난 19일부터 22일까지 중국국제우호연락회의 주선으로 상하이와 자싱시의 홍색관광 유적지들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중국의 홍색관광 현장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번 여행을 주선한 중국국제우호연락회는 중국 혁명 8대 원로 중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천윈(陳雲)의 아들인 천위안(陳元)중국 정협 부주석이 회장을 맡고 있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국제 공공교류기관이다. 중국국제우호연락회는 특별히 카오훼이(高卉) 아주부 부주임을 동행하도록 해주는 등 각별한 배려를 해주었다.


19일 오후 4시쯤 상하이 옛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 제 1차 전국대표대회 유적지를 찾았을 때는 폐관 시간이 다가오는 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관람을 하고 있었다. 참관객 수를 표시하는 전광판에는 이날 방문객 수가 4천명을 넘어섰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단순히 당원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과 어린이들도 많았다. 홍색관광의 대중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장성 자싱시 난후에 있는 홍선. 이 작은 배가 중국 공산당의 모태이다.    ©브레이크뉴스

▲중국인들이 상하이 중국 공산당 제 1차대회 유적지를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브레이크뉴스

▲홍선 앞에서 중국 공산당 당기를 들고 사진을 찍는 당원들.    ©브레이크뉴스

▲상하이 중국 공산당 제 1차 대회 유적지 앞에선 까오훼이 중국국제우호연락회 부주임(왼쪽)과 권기식 칭화대 방문학자.     ©브레이크뉴스

▲김구 선생이 2년 넘게 피신했던 난후 인근의 피난처 유적지를 방문한 권기식 칭화대 방문학자.     ©브레이크뉴스


이곳은 1921년 7월 23일 중국 공산당 당원 57명을 대표한 13명이 비밀리에 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한 곳이다. 당시 마오쩌뚱 전 주석은 후난(湖南)성 창사(長沙) 소조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했다. 중간에 회의 장소가 발각돼 일부가 체포된 뒤 나머지는 달아나 저장성 자싱시 난후의 호수 가운데 작은 배를 띄워놓고 회의를 마쳤다. 이렇게 시작한 중국 공산당이 지금은 당원 8875만명(2017년 19차 당대회 기준)의 세계 최대 정당으로 성장했다.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적지는 프랑스 조계에 있는 평범한 회색 건물이다. 이곳에서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2명을 포함한 15명이 함께 차를 마시며 중국 공산당의 첫발을 떼었던 것이다. 1925년 4월 17일 경성의 중식당 아서원에서 창당대회를 한 조선공산당의 비극적인 몰락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중국 공산당의 성공과 조선 공산당의 몰락은 동북아시아의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유적지 주변에 상가와 카페, 술집 등이 많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한 단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적지를 방문한 사람들은 기념관 내 서점에서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책을 사거나 기념품을 사는 등 공산당의 과거 역사와 현재의 모습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갖는 모습이었다. 일부 당원들은 당기를 들고 기념관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중국 공산당이 중국인들의 생활 속에서 살아 있는 정당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기율을 엄수하고 비밀을 지키며...언제라도 당과 인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를 갖추고 영원히 당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지난 10월 31일 19차 당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시진핑 주석은 6명의 상무위원을 대동하고 이곳을 찾아 입당선서를 재연했고, 이 장면은 CCTV의 저녁뉴스를 통해 중국 전역에 방송됐다. 중국 당 최고지도부 전원이 단체로 지방나들이를 하는 것도 경호 문제 등을 생각하면 이례적인데, 입당 선서 이벤트까지 한 것을 보면 고도로 기획된 정치행사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21세 청년시절인 1974년 10번의 입당 신청 끝에 힘겹게 입당한 시진핑 주석이 입당 선서 재연식을 이곳에서 한 것은 중국 인민들에게 창당의 초심을 잃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당원 57명, 창당대회 대표자 13명의 지하 불법 정당이던 중국 공산당이 지금은 세계 최대의 성공한 정당으로 성장했고, 중국도 G2의 성공한 국가가 되었지만 이것에 만족해서는 ‘중국몽’을 이룰 수 없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요즘 중국 전역 곳곳에 ‘불망초심(不忘初心)’의 슬로건이 나붙어 있는 것도 이같은 시 주석의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특히 중국 공산당의 창당, 옌안대장정,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등 세가지 역사를 잊지 말고 앞으로 나가자는 의미가 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1일 저장성 자싱시의 난후를 찾았다. 난후는 저장성 3대 명호(名湖) 중 하나인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청나라 건륭황제가 즐겨 찾았던 연우루(煙雨樓) 등 유적지가 많아 사시사철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섬 가운데 조그만 섬이 있고 주변에는 유람선이 한가로이 떠다니고 있었다.


1921년 8월 2일 마오쩌뚱 등 중국 공산당 대표 일부가 이곳에 모여 작은 유람선 한척을 대절해 난후에 띄우고 창당선언문과 당 강령을 통과시켰다. 중국 정부는 1959년 이 배를 복원해 96년 전의 그 자리인 난후 가운데 있는 섬 선착장에 띄워 놓고 보존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과 혁명의 상징색을 본 따 ‘홍선(紅船)’으로 불리는 데, 폭 3m 길이 16m 크기의 이 작은 배가 8900여만명의 당원을 지닌 중국 공산당의 모태가 된 셈이다.


여행 비수기인 겨울철 오전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난후 홍선을 보러 몰려들었다. 주차장에는 전국 각 지방 번호판을 단 관광버스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선착장에서 홍선 유적지가 있는 섬까지 운행하는 유람선에도 단체 관광객들이 많았다. 홍선 유적지에 도착하니 학생 단체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에서도 붉은 색 중국 공산당 당기를 들고 사진을 찍는 단체 관광객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기독교나 불교의 성지 순례 분위기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국 인민들에게 이곳은 자랑스러운 혁명의 성지인 것이다.
자싱은 우리에게도 역사적 인연이 깊은 곳이다. 홍선 유적지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1㎞ 남짓한 메이완루(梅灣路)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 주석의 피난처가 있다. 김구 선생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시작된 일본 경찰의 무차별 검거선풍을 피해 상하이에서 이곳 자싱 난후로 피신해왔다. 그는 자싱의 항일애국인사였던 중국인 주푸청의 집에서 2년 넘게 도피생활을 했다. 김구 선생이 피신한 집은 수로를 통해 난후와 연결돼 있는 데, 집주인 주푸청은 김구가 언제든 도피할 수 있도록 집 앞 운하에 쪽배를 대기시켜 놓았다고 한다.


내가 이곳은 찾은 21일에는 김구 선생의 피난처 유적지가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 내부를 둘러보지 못했지만 저장성 정부가 문화재로 지정해 잘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만 홍선 유적지와 달리 이곳을 찾는 한국인이 별로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도 중국 공산당 대회 유적지와 불과 400m 떨어져 있고, 홍선 유적지와 김구의 피난처가 1㎞ 남짓의 거리에 있는 것을 보면 중국과 한국의 역사적 유대를 실감할 수 있다. 중국 혁명의 역사에는 옌안에서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 등 수많은 조선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도 함께 있었다. 한국과 중국이 미래를 함께 가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kingkakwon62@daum.net

 

*필자/권기식


중국 칭화대 방문학자. 한중도시우호협회장. 한겨레신문 기자와 청와대 정치국장, 한양대 교수, 평창동계올림픽민간단체협의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중 공공외교단체인 한중도시우호협회 회장과 영남매일신문 회장,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등을 맡고 있다. 한중 공공교류에 앞장서는 중국 전문가이며, 중국 외교부 초청으로 지난달 1일부터 칭화대에서 한중관계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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