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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12-29 조회수 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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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사의 세 번째 변곡점을 만드는 시진핑 주석 <중국 현지보고>

중국 현대사의 세 번째 변곡점을 만드는 시진핑 주석

<중국 현지보고>국과 개혁개방 성공 이어 세계 최강대국 건설 추진

권기식 중국 칭화대 방문학자 | 기사입력 2017/12/29 [10:25]

 

▲상하이 중국 공산당 제 1차 당대회 기념관에서 시진핑 주석의 19차 당대회 연설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브레이크뉴스

 

상하이 중국 공산당 제 1차 당대회 기념관에서 시진핑 주석의 19차 당대회 연설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20세기 세계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드라마는 중국에서 만들어졌다. 그 드라마에는 마오쩌뚱(毛澤東)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한 개혁개방이라는 두 번의 변곡점이 있었다. 지금 중국에서는 한명의 지도자와 14억 인민이 함께 세계 1등 국가를 향한 역사 드라마를 만들어 가고 있다. 시진핑(習近平)이 주도하는 세 번째 역사적 변곡점이다. 이 드라마는 21세기 세계사의 가장 역동적인 드라마가 될 것이기에 세계는 시진핑 주석과 중국 인민들을 주목하고 있다.


1921년 7월 23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는 한 건물에서 제 1차 당 대회를 열 당시 중국 공산당의 당원 수는 53명에 불과했다. 창사(長沙) 소조의 대표로 참석한 마오쩌뚱은 당시 28세로 창사 제 1사범학교 부속 소학교 교장이었다. 그는 베이징대 문과학장을 지낸 천두슈(陳獨秀)  처럼 명망을 지닌 사람도 아니었고, 덩샤오핑처럼 외국(프랑스) 유학을 한 유학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 현대사를 바꾼 지도자가 되었고, 20세기 세계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중 한명이 되었다.


마오쩌뚱은 1893년 허난(湖南)성 샤오산(韶山)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전형적인 중국 농촌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에 들어가지도 외국 유학을 하지도 못한 ‘토종’이었다. 양치 대신 차로 입을 헹구는 습관을 평생 지닐 정도로 농민과 같은 소탈한 품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허난의 궁벽한 시골 출신이 천두슈와 같은 명망을 지닌 쟁쟁한 인물들을 제치고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 봉건적 군벌과 외세에 의해 갈가리 찢긴 대륙을 통일한 위대한 지도자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초기 중국 공산당 최고 지도자였던 천두슈가 트로츠키파로 변신하고 당을 떠나 초라한 생을 마친 것과 달리 성공한 혁명가가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베이징 판자위앤 시장 기념품 판매점에 마오쩌뚱 초상화와 배지 등이 나와있다.    ©브레이크뉴스

▲중국의 도시 곳곳에 19차 당대회 정신을 학습하자는 내용의 선전물이 걸려있다.     ©브레이크뉴스

 

첫째, 마오는 그 당시 중국 국민의 주류였지만 소외되고 있었던 농민과 함께하는 리더십을 보였다. 그는 농민 출신이었고 농민의 혁명 역량을 주목한 유일한 지도자였다. 명망가와 지식인들은 무지한 농민이 공산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보고 도시 노동자와 지식인 중심의 운동을 벌였으나, 그는 중국 농민이 해방과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농민에 대한 사랑은 30년대 혁명운동 과정에서 만든 ‘삼대기율 팔항주의’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당시 중국의 군대란 국민당군이고 군벌이고 간에 무장한 강도 수준의 행각을 벌여 주민에 대한 약탈과 살인 등을 일삼았다. 그러나 마오쩌뚱의 군대는 농민에 대한 민폐를 엄금했고, 이를 어기면 즉시 사형이었다. 그래서 농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병력의 충원도 용이했다.


둘째, 그는 중국식 전술전략에 능한 지도자였다. 13세 때 독학으로 중국 고전을 공부한 그는 국민당군에 비해 크게 열세인 홍군을 이끌고 중국의 지리적 실정에 맞는 전술전략을 구사했다. 적진아퇴(敵進我退 - 적이 진군하면 아군은 물러난다) 적주아요(敵駐我擾 - 적이 주둔하면 아군은 교란한다) 적피아타(敵疲我打 - 적이 피로하면 아군은 공격한다) 적퇴아추(敵退我追 - 적이 물러나면 아군은 추격한다). 그가 주창한 ‘16자 전법’은 홍군 유격전술의 기본이었으며, 현대 비즈니스 전략으로도 활용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셋째 그는 결단의 지도자였다. 1934년 10월 국민당군의 공세로 인해 궤멸상태에 놓인 홍군은 마오의 지도하에 대장정을 결정해 장시(江西)성에서 산시(陝西)성 옌안(延安)까지 25,000리 고난의 행군을 한다. 8만6천여명이 출발해 7천여명이 살아남은 대장정은 완주율이 3.5%에 지나지 않은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군사전략이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가족과 동지들을 잃었지만 홍군의 혁명 역량을 보존하고 1935년 1월 이른바 ‘쭌이(遵義)회의’를 통해 중국 공산당의 지도권을 접수해 마침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마오쩌뚱에 대한 중국 인민의 평가는 ‘번신물망모택동(飜身勿忘毛澤東) 치부물망등소평(致富勿忘鄧小平)’이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신분이 바뀐 것은 마오쩌뚱의 덕이고, 잘 살게 된 것은  덩샤오핑의 덕이니 이 두 사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중국 역사가들은 마오쩌뚱을 ‘파(破)’의 지도자, 덩샤오핑을 ‘입(立)’의 지도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오쩌뚱은 구질서를 깨뜨리고 신중국을 열었고, 덩샤오핑은 그 바탕 위에 중국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을 성공의 길로 이끌어 중국 역사의 두 번째 변곡점을 만들어 냈다. 그는 1904년 쓰촨(四川)성에서 집에 방이 12칸이나 있을 정도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유학을 거쳐 공산당에 입당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최고 지도부 반열에 올랐으나, 문화대혁명 기간 중 실각해 8년여간 시골에서 유폐생활을 하다 1977년 복권된 이후 ‘시장경제를 하는 공산당’을 만드는 ‘개혁개방’을 주도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하방(下放 - 당의 관료주의를 막기 위해 마오쩌뚱이 주도한 정신개조 운동)’ 생활을 하던 그는 매일 30 바퀴나 집을 돌면서 신체를 단련하고 개혁개방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는 복권 후 ‘샤오캉(小康)’ 사회 건설 등 ‘삼보주(三步走)’를 내세우며 개혁개방과 시장경제로의 변화를 주도했고, 중국 공산당은 세계 유일의 성공한 공산당이 되었다.

 

▲중국의 상징인 천안문에 걸린 마오쩌뚱의 대형 초상화 앞에 선 권기식 칭화대 방문학자.    ©브레이크뉴스


필자는 베이징 생활을 하면서 가끔 판자위앤 시장을 찾는다. 이곳은 각종 골동품과 장신구 등을 파는 전문시장인데, 이곳 한켠에 헌책과 사회주의 기념품들을 파는 곳이 있어 종종 둘러보곤 한다. 이곳을 걷다 보면 아직도 많은 중국인들이 마오쩌뚱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오의 어록집이라든지, 사진, 기념품 등이 잘 팔리고 있다. 이곳에서는 덩샤오핑 관련 책자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지도자들에 대한 자료나 기념품은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두 지도자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역사의 변곡점이 지금 또다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바로 시진핑(習近平) 주석에 의한 ‘중국몽’ 드라마이다. 이 대변혁 작업은 이제 시작되었으며, 그 향방에 따라 세계 문명사에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작은 담론에 비하면 이 담론은 전 지구적이고, 세대를 넘는 포괄적 성격을 띠고 있다. 또 이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지난 세기 세계사의 흐름을 주도했던 미국의 영향력 퇴조와 맞물려 있다.


1953년 태어난 시 주석의 삶은 마오쩌뚱·덩샤오핑과 뒤얽혀 있다. 그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은 마오쩌뚱의 혁명 동지였으며, 마오쩌뚱 집권 당시 당 중앙선전부장과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다. 그는 혁명 노선에 철저한 사람이었고, 인품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시진핑 리더십의 뿌리는 바로 그의 아버지 시중쉰이다. 그는 1962년 9월 제 8기 10중전회에서 반당 집단으로 몰려 국무원 부총리에서 해임되었고, 1978년 복권 이후 1979년 광둥(廣東)성 성장을 지냈다. 이 때 그는 덩샤오핑의 노선을 충실히 이행해 선전시 경제특구를 고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이 마오쩌뚱의 혁명 동지이면서도 덩샤오핑과 개혁개방을 함께 했다는 것은 시 주석의 리더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의 영향과 7년에 걸친 량자허(梁家河)에서의 지식청년 경험, 칭화대에서의 학창생활이 오늘의 시진핑을 만든 3대 핵심 요소이다. 시진핑 주석이 마오쩌뚱과 덩샤오핑을 합친 인물 같다는 세평도 이같은 성장 배경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은 마오쩌뚱이 이룬 대륙통일을 통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덩샤오핑이 이룬 경제성장의 바탕 위에 세계 최강 국가 건설과 중화 중심의 ‘신문명 시대’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제 19차 당대회를 통해 그는 이같은 구상을 중국 인민과 세계에 당당하게 밝혔다.


중국어로 오너를 라오반(老板)이라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에서 라오반은 마오쩌뚱과 덩샤오핑 밖에 없었다. 그는 중화의 라오반으로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드는 야심찬 구상을 추진하고 있다. 그의 구상이 과연 이루어질 것인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kingkakwon62@daum.net

 

*필자/권기식
중국 칭화대 방문학자. 한중도시우호협회장. 한겨레신문 기자와 청와대 정치국장, 한양대 교수, 평창동계올림픽민간단체협의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중 공공외교단체인 한중도시우호협회 회장과 영남매일신문 회장, 서울미디어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등을 맡고 있다. 한중 공공교류에 앞장서는 중국 전문가이며, 중국 외교부 초청으로 지난달 1일부터 칭화대에서 한중관계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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